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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굴다리에서 채미전까지
분류 동인천이야기 작성일 2015-09-04
담당자 정경숙 전화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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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1899 to 2015

동인천 굴다리에서 채미전까지


‘동인천역’이란 이름이 붙은 지 올해 딱 60년이다. 철길이 깔리고 정거장이 문을 연 후 동인천은 오랫동안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 듯하지만 110여 년 전에 달려왔던 철마는 오늘도 쉬지 않고 달린다.
현재 동인천역을 통과하는 열차의 하루 운행 횟수는 상·하행선을 합쳐 458회. 2,3분에 한 번씩 기차가 지나간다.
동인천역을 이용하는 1일 승객 수는 약 4만 명이다. 여전히 많은 인천인이 매일 동인천으로 모이고 스쳐간다.
사람은 가고 건물은 사라져도 지역이 품은 이야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동인천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 편집장



# 축현역발 금강산 여행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현재의 동인천역 이름은 축현역이었다. 축현(杻峴)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이다. 축현역은 지금의 동인천 청과물 시장에 있었다. 승객이 많아지며 구내가 좁아지자 1908년 아예 역을 앞쪽 넓은 공터로 옮겨 버린다. 그곳이 현재의 동인천역 자리다.
‘축현역’이라는 이름이 인천을 대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르기도 어렵다는 여론이 일자 1926년 조선매일신문사는 역명을 공모했다. ‘상인천역’ ‘동인천역’ ‘인천중앙역’ ‘신인천역’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고, 그중 상인천역이 선정되었다. 광복 후 일본인들이 명명한 역 이름이 싫다고 해서 1948년 상인천역을 축현역으로 환원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이 역 이름이 어렵다고 하자 1955년 축현역을 동인천역으로 또 바꿨다. 역 이름이 동인천역이 되면서 이 일대는 이때부터 인천을 대표하는 동인천 지역이 된다.

축현역에서는 전국 팔도 유람이 가능했다. 1925년 가을 축현역장의 발기로 4박 5일 금강산 단풍놀이 관광객(탐승단)을 모집했다. 10월 5일 오후 8시 55분 축현역을 출발해 원산에 도착한 후 6일 오전 8시 원산을 떠나 오후 2시 30분 장전역에 도착했다. 자동차로 해금강 입구에 도착해 온정리에서 1박하고 7일 옥류동 구룡폭포 등을 걸어서 둘러보고 8일 만물상을 관람한 후 도정리에서 자동차로 장전역을 경유하여 오후에 원산에 도착했다. 야간열차로 9일 오전 8시 50분 축현역에 도착함으로써 닷새간의 금강산 기행을 마쳤다.
1924년 승강객은 89만5천567명으로, 10년간 3.5배 증가했다. 경성역과 평양역에 이어 조선에서 3위를 점하는 역이었다. 1922년 5월 조선중앙경제회가 주최하는 기차박람회가 축현역에서 열리기도 했다. 



# 인영극장과 인형극장

예나 지금이나 극장이 있는 곳이 한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 동인천역 주변에는 많은 극장이 있었다. 별제과(현 대한서림) 건너편에는 인영극장이 있었고, 좀 떨어진 곳에 애관극장(경동)이 있었다. 역 뒤쪽 양키시장 근방에는 미림극장과 오성극장이 있었고, 좀 떨어진 곳에 문화극장(배다리), 인천극장(화평동)이 있었다.
인영(仁映)극장은 1941년 11월 기공식을 한 ‘인천문화영화극장’의 후신이다. 이 극장을 지은 사람은 동산고등학교를 설립한 이흥선 씨다. 현재의 하나은행 자리에 당시 최신식 단층 건물을 짓고 은막을 펼치고 영사기를 돌렸다. 인영극장은 1952년 경매 입찰로 김모 씨에게 넘어갔다. 인천시장은 1962년 위험 건물이라는 이유로 극장 개축 명령을 내렸다. 김 씨는 6.25 전쟁 때 포격으로 벽에 금이 간 단층 건물을 헐어버리고 2층 건물을 신축해 재개관했다.

1973년 11월 26일 인영극장은 다른 업종으로 변경하기 위해 기존 2층 건물을 헐고 당시 동인천에서 가장 큰 ‘빌딩’인 6층으로 새로 올렸다. 볼링장(3, 4층)과 탁구장(6층) 등이 들어서면서 늘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볼링장은 짧은 레인 등 국제 규격에 미달, 공식 경기를 치르지 못했고 오래지 않아 문을 닫았다. 탁구장은 후에 허니문커피숍으로 신장개업했다가 다시 롤러스케이트장이 되었다. 허니문커피숍은 인천 최초로 유니폼을 입은 레지들이 서빙을 했다. 지하에는 허니문고고장이 들어섰다.
길 건너에도 환희고고장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맥주병에 막걸리를 담아 팔았다. 이 고고장 사장 김모 씨의 꿈은 인영극장 같은 영화관을 운영하는 것. 인영극장이 폐관하자 오매불망 영화관을 갖고 싶었던 고고장 사장은 동인천길병원 맞은편 지금의 수요양원 자리에 ‘인형’극장을 개관한다. ‘인영’에서 이름 한 글자만 바꿔 ‘인형’ 간판을 달았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인현동전자상가는 서울의 세운상가를 빼고는 수도권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한때 축현초교 담장에는 한 평 남짓한 판잣집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상인들은 좌판 위에 광석라디오, 선풍기, 진공관 등 온갖 부속품을 늘어놓고 팔았다. 좌판은 1970년대 후반 학교 앞에 큰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일부가 양조장으로 사용했던 앞 건물로 입성하면서 인현동 전자상가의 역사를 계속 이어갔다.
인천 각 동네에서 수집된 고물들이 이곳으로 모였다. 전선 하나 나사 하나 허투루 버리는 일이 없었다. 장기 이식하듯 고장난 물건에서 부속품을 적출해 다시 각각 조립,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은 이곳 솜씨 좋은 전자상가 기술자들의 몫이었다. 가끔 후미진 가게에서는 밀수되거나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라디오, 다리미, 전기면도기 등이 거래되곤 했다. 어쩌다 인근에 사는 양색시 손에 전축이나 TV가 들려오곤 했다. 그렇게 이 골목에서는 세상의 모든 전자제품이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돌고 돌았다. 


개장 초기의 인천백화점

# 잃어버린 광장과 하늘

지금의 동인천 민자역사(民資驛舍)가 들어서기 전 역 앞은 그야말로 풍광이 시원해서 너머 수도국산의 자태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역 앞 ‘광장’에서는 규탄대회, 궐기대회, 환영행사, 기념행사 등 각종 집회가 자주 열렸다.
광장은 약장수들의 마케팅 장소로도 그만이었다. 뜨내기가 많이 모이기 때문에 ‘허접한’ 물건을 팔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시선을 끌기 위해 차력 ‘쑈’나 마술, 그리고 약식 서커스를 하곤 했다. 어릴 적에 동인천역 광장에서 차력 ‘쑈’를 본 적이 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차력사들이 차돌을 당수로 마구 부수던 장면과 못 박힌 널빤지 위를 맨발로 걷던 장면, 그리고 누운 사람의 배 위에 돌을 놓고 해머로 내려치던 장면 등이다. 차력사들은 쑈 중간 중간에 ‘약’을 팔았다. 구경하던 어른들은 히히덕거리며 하나씩 사곤 했다.
광장에서는 종교 집회도 열렸다. 1950년 5월 7일부터 13일까지 일주일 동안 인천기독교연합회는 주야 3회에 걸쳐 기독교대부흥전도회를 개최했다. 더 많은 사람이 참석할 수 있게 밤 집회는 축현역 광장에서 진행했다.
 
‘괴물’ 민자역사는 동인천을 망쳐버린 장본인이다. 1988년 (주)동인천역쇼핑센터 및 동인천역 민자역사 신축공사를 착공해 이듬해 4월 15일 지하 3층 지상 5층 ‘인천백화점’이 개점하였다.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민자역사였다.
1999년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로 이 지역 상권이 위축되었다. IMF 경제 위기까지 겹쳐 인천백화점의 매출이 급감하였다. 결국 2001년 백화점은 폐업했고 패션 전문 쇼핑몰 형태인 ‘엔조이쇼핑몰’로 업종을 전환하였다. 이때 백화점 건물 4∼5층에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TV 경륜장이 들어섰다. 현재는 화상 경정장까지 들어오면서 인천시민은 동인천의 ‘광장’과 ‘하늘’을 잃어버렸다.


1963년 개통 구지하도

# 우리의 마실길 지하상가

동인천은 지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땅 밑에도 동인천은 있다.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지하에 사통팔달의 길이 마치 개미굴처럼 뚫려 있다. 1967년 6월 3일 동인천지하도가 개통되었다. 차량의 원활한 소통과 안전한 보행을 위해서다. 이것은 표면적 이유였고, 실제로는 민방공 대피용 목적이 더 강했다.
이미 동인천에는 동인천지하도에 앞서 1963년도에 뚫린 ‘역전 지하도’가 있었다. 동인천역(인현동)에서 중앙시장(송현동) 쪽으로 뚫린 지하도다. 경인선 철길 밑을 뚫어 만든 일종의 반(半)지하도로 흔히 ‘굴다리’라고 불렀다. 현재 인천지역 내에는 총 15개의 지하도상가가 조성돼 있는데 이 굴다리 지하도가 원조인 셈이다.
이 지하도는 우여곡절 끝에 1963년 11월 20일 인천에서 최초로 폭 8m, 길이 70m로 개통되었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놓인 이후 64년 만에 동인천의 남과 북이 뚫린 것이다. 처음엔 상가가 들어서지 않아 말 그대로 어두컴컴한 지하도로 였다. 가게가 들어서 시장(지하도자유시장)으로 등록된 때는 1966년 6월 26일이다. 점포수는 59개였다. 
굴다리 상가 개통 이후 동인천은 가히 지하도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1967년 동인천지하도 이후 1971년 새동인천 지하상가가 연결되었고 1974년 동인천지하상가가 준공되었다. 1977년 용동마루턱까지 닿은 중앙로지하상가가 완공된 이후 1980년 인현지하상가, 1983년 신포지하상가가 조성됐다. 올 5월 17일 지하상가 때문에 설치되지 못했던 횡단보도가 역 앞과 답동성당 건너편 신포시장 앞에 등장했다. 약 40년 만에 도로 위에 하얀 줄이 쳐진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시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도가 계획된 적이 있다. 1970년대 초 인천시는 ‘동인천 터널공사’를 계획한다. ‘1970년도 시정백서’를 보면 교통량을 분산하고 소통을 고도화하기 위해 동인천과 하인천을 관통하는 터널 공사를 2개년 사업으로 계획한다.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없지만, 동인천역 앞에서 응봉산(자유공원)을 관통해 하인천(현 인천역)으로 갈 수 있는 터널을 계획했던 것을 보인다.
이 터널이 개통되면 동인천과 하인천 간의 거리가 현 1.5㎞에서 0.3㎞(300m)로 크게 단축된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터널 양쪽에 100여 개의 점포를 유치해 지하상가를 조성한다고 계획했던 것으로 보면, 이것은 차량이 통행하는 ‘터널’이 아니라 사람들이 통행하는 지하도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계획이 성사되었다면 산 밑을 관통한,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지하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 깡시장과 똥골

1930년 공설청과물시장이 지금의 중구 인현동 넓은 공터에 문을 열었다. 현재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철교까지 도매 과일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한동안 ‘채미전거리’라고 불렸다.
1960년대 경 청과물도매시장으로 다시 꼴을 갖춰나가면서 현재의 주차장 자리에 인천원예협동조합 경매공판장이 있었다. 중매인과 도매상인들은 이곳을 ‘깡시장’이라고 불렀다. 한창 때 과일 도매 가게 40여 곳과 제사용품을 파는 건어물 가게 10여 곳이 있었다. 현재는 청과물(과일) 도매 가게 3곳, 건어물 가게 4곳만이 남았다.

인천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종자가 개발된 적이 있다. 청과물시장 인천원예조합 조합장을 했던 이영모 씨가 1970년대 후반 ‘용현무’를 개발했다. 용현무는 생육이 빨라 도시 근교 열무 재배에 적합하다. 잎은 녹색이며 모양은 절엽으로 열무 맛이 좋고 추대는 중간 정도로 추위에 강한 편이다. 명칭으로 볼 때 용현무는 용현동 지역에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잘 팔릴 때는 전국 종묘상에서 봉투에 담아 근으로 달아서 판매했다고 한다.
도심 인현동에 기찻길 옆 오두막이 있다. 제대로 보이질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곳. 동인천청과물시장 건너편 빌딩 뒤편에는 ‘쪽방촌’이 있다.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이 100여 곳 철로를 따라 동인천역에서 배다리철교 가까이 길게 늘어서 있다. 앞쪽 길가에 2, 3층 건물들이 세워져 있고 뒤로는 철도 방음벽이 길게 쳐있어 마치 협곡 안에 마을이 들어앉은 형상이다. 

일제강점기 때 동인천역이 화물을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철길 옆에 마루보시(대한통운 전신) 하역창고가 생겼고, 이곳에서 일하는 짐꾼들이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은 6.25 전쟁이 끝나고서다. 터를 제대로 잡지 못한 피란민들이 후미진 이곳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10평 남짓이 대부분이고 커봐야 20평 정도다. 정착민 중에는 그 당시 인현동 원예공판장(청과물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도 있었다. 날품 파는 목수와 굿으로 연명하는 만신 등도 들어와 함께 터를 잡았다.
최근 쪽방촌 골목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공동주택을 건설하기 위해 집 몇 채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한쪽 골목이 허물어지면서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 후미졌던 곳이 속살을 드러냈다. 마침내 재개발의 바람이 기찻길 옆 오막살이 인현동 쪽방촌 골목을 휘감고 있다. 집을 내준 어르신들은 어디에 거처를 마련했을까.  

동인천역 쪽으로 난 좁은 쪽방촌 골목은 한때 ‘똥골’이라 불린 사창가였다. 1970~80년대, 낮이고 밤이고 역 광장에 아줌마 포주들이 나와 호객 행위를 했다. 사창가의 시작은 1960년대 초쯤으로 보인다. 4.19혁명이 한창이었던 때 이곳에 살면서 내동에 있는 여관에 아가씨를 알선하던 어떤 사람이 아예 자기 집에서 ‘손님’을 받기 시작하면서 골목에 붉은 등이 켜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그 옛날 윗동네 용동 기생집, 니나노방석집 등 유흥가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흘러들어 오면서 사창‘가’로 변했다.
‘여자’ 장사가 잘돼 이웃 쪽방촌 골목으로 점점 확장될 조짐이 있었다. 이미 살던 골목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해 ‘침범’을 막았다. 골목 안 구멍가게를 경계 지점으로 설정했다. 이 가게는 아가씨들에게 물건을 대주거나 돈도 빌려 주면서 그런대로 재미를 봤다. 가게 아줌마는 심지어 원치 않게 낳은 아이를 잠시 맡아서 기르기도 했다. 지금은 ‘집창촌’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세가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도 대여섯 집은 밤이 되면 홍등을 걸어 놓는다.




# 다시 광장

1899년 개통한 경인철도는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지역을 두 동강 냈다. 대한서림이 있는 인현동 쪽과 수도국산으로 향하는 송현동 쪽으로 확연히 갈라놨다. 오랫동안 인현동 방면을 흔히 동인천 ‘앞쪽’이라고 불렀고 송현동 방면을 ‘뒤쪽’이라고 했다. 이것은 순전히 역 개찰구 방향 때문에 붙은 명칭이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렇게 ‘뒤편’으로 밀려나 있던 송현동 쪽이 이제는 ‘앞편’이 되었다. 수도국산에 커다란 성채 같은 대단위 아파트(솔빛마을)가 세워지고 북쪽 개찰구 앞에 넓은 동인천 북광장이 생기면서 100여년 만에 앞뒤가 ‘확’ 뒤바뀐 것이다. 

2014년 9월 18일 오후 북광장이 술렁거렸다.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성공 기원 성화봉송이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방송인 클라라가 코리아나 출신 아버지 이승규 씨와 함께 북광장에 나타나자 행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클라라는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북광장에서 배다리 삼거리까지 약 200m 구간을 달렸다. 26년 전 88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는 성화 봉송은 인현동 쪽 광장에서 진행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2015년 9월 중순 발간 ‘동인천 잊다 있다’
시청(현 중구청)의 동쪽에 있다’ 해서 그 이름을 얻은 동인천(東仁川). 그 영역은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좁게는 기차역과 그 관련 시설이 있는 중구 인현동 일부 정도, 넓게는 용동마루턱을 넘어 신포동과 자유공원 그리고 중앙시장과 배다리까지 본다. 더 넓게 보면 제물포역과 인천역 사이를 통째로 동인천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곳은 ‘한때’ 인천의 중심지였다. 그 한때는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를 말한다. 배후에 공장과 시장 그리고 거대한 주거지가 자리하고 있어 큰 길 작은 길 할 것 없이 늘 붐볐다. 기차를 비롯해 거의 모든 시내버스가 통과했기 때문에 외곽의 사람들도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동인천 잊다 있다’는 이 지역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역사(歷史)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기찻길이 놓인 1899년부터 오늘 2015년까지 동인천이 만들어 낸 서사(敍事)를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 동인천의 영역은 남북으로는 용동마루턱에서 북광장까지, 동서로는 배다리철교에서 화평철교까지 설정했다. 책은 일곱 부분으로 나눠 기술했다.
누구나 이곳을 ‘중심지였다’라고 말했는데도 그동안 지역 연구자나 향토사학자 시선에서 살짝 비켜난 지역이다. 근처의 개항장, 차이나타운, 배다리, 중앙시장 등은 어떤 방식으로든 몇 번씩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무슨 연유인지 그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올해는 ‘동인천역’이란 이름을 얻은 지 60년, 동인천 퇴락의 주요인이라고 ‘원망’ 듣는 인천시청사가 이전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저자(유동현·굿모닝인천 편집장)는 ‘잊은’ 것도 많지만 현재의 ‘있는’ 것을 얘기하고 앞으로 이어 나갈 이야기를 담았다. 동인천, 잊다 있다 그리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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